새뮤얼 모스 _ 모스부호 발명

2020. 5. 11. 21:56Life/상식 &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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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몰하는 타이타닉호에서 SOS(긴급 구조요청 신호)를 보내고 영화 <기생충>에서 메시지를 보낼 때 사용했던 '이것'. 본격적인 통신 혁명의 시작을 알렸던 이것은 '모스부호(Morse Code)'다.

모스부호는 전신을 보낼 때 사용하는 전신 부호다. 길이가 짧은 신호인 점(dot)과 길이가 긴 신호인 선(dash)으로 이뤄진다. 이를 조합해 영문 알파벳과 숫자와 연결시켰다. 신호의 길이만 파악하면 간단한 메시지 정도는 쉽게 구별해낼 수 있었다.

모스부호를 발명한 새뮤얼 모스 (출처:Library of Congress)

모스부호는 새뮤얼 모스(Samuel Finley Breese Morse)가 자신의 이름을 따 만든 것이다. 이쯤 되면 그가 발명가나 통신기술자로 경력을 쌓은 사람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 발명이란 것을 시작하기 전까지 그의 직업은 화가였다.

새뮤얼 모스는 부모의 기대를 받으며 미국 예일대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종교 철학, 수학과 같은 과목을 수강했다. 전기 관련 강좌도 수강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1810년 대학교를 졸업하고 전통적인 직업을 갖기 원했던 아버지의 권유로 출판사에 입사하게 된다. 하지만 일은 잘 맞지 않았다. 결국 부모는 예술가의 길을 걷고 싶어 하는 모스의 의사를 존중하기로 한다. 1811년 7월 모스는 그림 공부를 위해 부모의 지원을 받아 영국으로 떠난다. 몇 년간의 공부를 마친 그는 1815년 집으로 돌아온다.

모스는 직업 화가의 길을 걷기로 한다. 하지만 그의 화풍은 미국 내에서 그다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그나마 생계를 위해 그렸던 초상화는 반응이 좋았다.

 

모스가 그린 존 애덤스와 제임스 먼로 초상화 (출처:Brooklyn Museum, White House Historical Association)

1816년에는 존 애덤스(John Adams) 전 미국 대통령의 초상화를 그렸고 1819년에는 당시 대통령이던 제임스 먼로(James Monroe)의 초상화를 그리는 등 부유층의 초상화를 자주 그려주곤 했다.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초상화가로 명성을 쌓던 그에게 평소처럼 초상화를 그려달라는 의뢰가 하나 들어온다. 1825년 코네티컷주 뉴헤이븐에 살던 모스는 집에서 멀리 떨어진 워싱턴 D.C.로 잠시 떠난다. 모스의 아내는 당시 셋째를 임신하고 출산이 임박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초상화 작업이 한창이던 그에게 한 통의 편지가 도착했다. 아내가 출산 후 심장마비로 사망했다는 편지였다. 날벼락같은 소식을 듣고 슬퍼할 시간도 없이 장례식이라도 참석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바로 집으로 달려가지만, 모스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장례식이 끝난 뒤였다. 당시 편지를 전달하는 가장 빠른 방법은 말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편지로 소식을 전달받고 출발하면 며칠이 훌쩍 지나가 버리기 마련이었다.

아내의 사망과 전신 기술 발명 사이에 직접적인 연관성은 밝혀진 것이 없다. 하지만 적지 않은 영향을 줬을 것이라는 추측이 많다.

모스의 아내 루크레티아 피커링 워커 (Lucretia Pickering Walker)

 

한동안 아내를 잃고 방황하던 모스는 다시 예술가로 경력을 이어간다. 1829년 프랑스 파리에서 몇 년을 보내다 1832년 다시 미국으로 돌아온다. 집으로 돌아가는 배 안에서 그는 미국 과학자 찰스 토마스 잭슨(Charles Thomas Jackson)을 만난다. 잭슨은 전자기학과 관련된 자신의 최신 연구를 소개했다. 이때 모스는 전기를 이용하면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서로 메시지를 주고받을 수 있겠다는 아이디어를 떠올린다. 뜻밖의 만남으로 전신 기술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모스는 뉴욕대학교 미술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하면서 전신기 연구를 이어갔다. 개발에 어려움을 겪는 그를 보고 같은 학교에서 근무하던 레너드 게일(Leonard Gale)은 전자기학과 관련된 조셉 헨리(Joseph Henry)의 연구를 소개한다. 헨리는 게일과 친구 사이였다. 헨리의 연구는 모스의 전신기 기술 개선에 큰 영향을 줬다.

전신기 제작에는 모스의 친구였던 알프레드 베일(Alfred Vail)이 도움을 준다. 베일은 자신의 가족이 운영하는 철공소에서 전신기를 만들기 위한 재료와 노동력을 지원한다. 게일과 베일은 이후에도 모스의 연구에 큰 도움을 준다.

모스의 초기 전신기

모스의 첫 전신기는 1835년쯤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기능 개선과 연구를 통해 기술을 고도화했다.

1837년 10월에는 특허청에 전신기 특허를 출원했다. 이듬해 1월 6일에는 전신에 사용하는 모스부호를 소개하고 전신기 시연에 성공한다.

필요한 것은 자금과 정부 지원이었다. 그의 연구는 가족이나 친구들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대부분 불가능한 도전 정도로 치부했었다. 그래서 연구에 필요한 돈은 자비로 해결해왔다. 자금 지원이 절실했던 모스는 꾸준히 의회에 지원을 요청했다. 하지만 응답이 없었다. 마침 대학교 동문이었던 헨리 엘즈워스(Henry Ellsworth) 당시 미국 특허청장이 그를 도왔다. 엘즈워스는 의회에 요청해 모스가 진행하는 연구에 자금을 지원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낸다. 모스는 고마움을 표시하고자 엘즈워스의 딸에게 전신으로 보내게 될 공식 메시지를 부탁하기도 한다.

 

모스부호와 문장 'What hath God wrought'를 모스부호로 변환한 표 (출처:wikipedia)

 

1844년 5월 미 연방정부의 지원으로 워싱턴 D. C.와 볼티모어 간 전신 메시지 전송에 성공했다. 최초의 원거리 통신이었다. 모스가 알프레드 베일에게 보낸 신호는 무사히 전달된다. 이때 전달된 메시지는 "신은 무엇을 만들었나(What hath God wrought)"라는 문장이었다. 구약성경 민수기 23장 23절에 나오는 구절로 엘즈워스의 딸이 직접 선택한 문장이었다.

사람들은 전신 기술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보았고 모스는 큰 성공을 누리게 된다. 미국 전역으로 광범위하게 전신선이 구축되기 시작했고 전신 사무소도 생겨났다. 전신을 통해 매년 3200만 건이 넘는 전신 메시지도 오고 갔다.

전신기는 모스 이전에도 있었다. 1794년 클로드 샤프(Claude Chappe)가 발명한 시각전신기는 1000km 떨어진 곳까지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었고 1837년 영국 발명가 윌리엄 쿡(William F. Cook)과 찰스 휘트스톤(Charles Wheatstone)은 전자기 전신기를 발명해 철도 산업에 사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날씨에 영향을 받거나 속도가 느리다는 단점이 있었다. 단일 전선 시스템으로 빠르고 정확했던 모스의 기술은 전신 기술을 확산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한다.

현대적인 전기 통신 시대를 알렸던 새뮤얼 모스. 전신 기술과 모스부호의 등장으로 소식을 전달하기 위해 말에 의존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 도래했다. 시간이 흘러 더 효율적인 통신 수단이 나타나 모스부호를 사용할 일은 없게 됐지만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다른 통신 수단 사용이 어려울 때 정보를 담아 전달하는 유용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신호의 짧고 길다는 차이만 전달할 수 있다면 가능하다. 해군 함정에서는 전기나 전파 방해가 생기면 구조요청을 위해 발광 신호로 모스부호를 사용한다.

 

 

출처:  현대적인 통신 기술 시작에는 그가, 새뮤얼 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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