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5. 11. 21:49ㆍLife/상식 & 교육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Alexander Graham Bell)은 전화기를 발명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전화기 하면 누구나 어렵지 않게 벨을 떠올린다.
1847년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서 태어난 벨은 에든버러와 런던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다. 벨의 어머니는 청각장애가 있었다. 어려서부터 어머니와 대화를 할 때면 목소리의 진동을 느끼고 싶어 이마를 가까이하고 대화를 나누곤 했다.
1870년 벨의 가족은 영국에서 캐나다로 이민을 갔고 이듬해에는 미국으로 이동해 그곳에 정착했다.
벨의 아버지 알렉산더 멜빌 벨(Alexander Melville Bell)은 발성법을 연구하고 가르쳤다. 청각장애인의 발성법에도 관심이 있었다.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벨도 음성치료사이자 청각장애인 교사로 일하게 된다. 어쩌면 오래전부터 관심 가져왔던 소리에 대한 관심이 전화기 발명으로 이어졌을지도 모르겠다.
벨은 1872년 보스턴에 학교를 열고 청각 장애 아동을 가르치는 교사들을 훈련했다. 또한, 청각 장애인을 대상으로 말하는 법을 가르쳤다. 학위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1873년에는 보스턴대학교 음성생리학 교수로 임용된다. 교육과 연구를 이어가던 벨은 보스턴대학교 학생이었던 메이블 허바드(Mabel Hubbard)를 알게 된다. 허바드는 어릴 적 전염병인 성홍열(scarlet fever)을 앓아 청력을 잃었고 벨에게 소리 내는 법을 배웠다. 둘은 곧 사랑에 빠졌고 1877년 7월 11일 결혼식을 올린다.
당시 전신을 이용한 통신이 활발하게 이뤄졌고 벨도 전신을 이용해 먼 곳에 떨어진 사람이 실시간으로 메시지를 주고받는 것이 놀라웠다. 그러나 벨은 전신이 가진 한계에 주목했다. 전신은 목소리로 전달하는 것보다 전달하는 정보량이 적었고 전신이라는 방식에 익숙해야 소통이 가능했다.
전기 통신에도 관심이 있었던 벨은 목소리를 통해 의사소통하는 더 나은 통신 기기를 제작하기로 결심했다. 기기 제작에는 기계공작 직원이었던 토마스 왓슨(Thomas A. Watson)의 도움을 받았다. 왓슨은 이후에도 벨의 조수로 일한다.
벨은 1876년 2월 14일 12시 미국 특허청에 전화기 특허를 신청했다. 특허명세서에서는 전화기를 '전신(telegraphy)'으로 불렀지만, 나중에는 전신 대신 '전기 음성 전화기(electric speaking telephone)'라는 용어로 고쳐 명명한다. 비슷한 연구를 했던 경쟁자이자 발명가였던 엘리샤 그레이(Alisha Gray)는 벨이 먼저 특허를 신청하는 바람에 특허권을 얻지 못했다. 공교롭게도 벨과 같은 날 특허청을 찾았지만 2시간 늦게 신청하는 바람에 희비는 엇갈렸다.
특허로 인해 벨은 무수히 많은 소송에 직면하게 된다. 전화와 관련된 특허로 600건이 넘는 소송을 치른다. 역시나 엘리샤 그레이가 가장 적극적이었다. 그레이는 벨과 특허권을 놓고 오랜 기간 소송을 벌였다. 몇몇 소송은 미국 대법원까지 가게 되지만 벨의 주장이 인정되면서 모두 승소한다.
1876년 3월 7일 마침내 특허 등록을 마치고 3일 뒤에 바로 전화기를 가지고 실험을 진행한다. 실험 도중 바지에 약품을 엎지른 벨은 자신도 모르게 "왓슨, 이리 와봐, 당신이 필요해(Mr. Watson, come here, I want you.)"라고 소리쳤고 이를 들은 왓슨은 황급히 달려왔다. 그런데 왓슨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상태였다. 벨이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전화기로 들려왔었고 이 사실에 놀라 달려왔던 것이었다. 전화기 발명은 성공이었다.
특허를 등록한 그해, 벨은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만국박람회에서 자신이 만든 전화기를 소개했다. 반응은 뜨거웠다. 탄탄대로를 걷게 될 것만 같았다. 부푼 기대를 안고 미국 최대의 전신회사 웨스턴유니언(Western Union)을 찾아가 전화기 특허를 팔고자 했지만 뜻밖에도 웨스턴유니언에서는 벨이 가져온 특허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당시 웨스턴유니언은 전신으로 막대한 수익을 창출하는 중이었다. 벨이 가져온 것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전화기는 미래가 불투명한 기술 정도로 여겼다.
벨은 하는 수 없이 직접 회사를 창업하기로 한다. 그래서 1877년 벨 전화회사(Bell Telephone Company)를 설립한다. 이후 벨의 전화기 특허를 몰라봤던 웨스턴유니온은 예전의 명성을 잃었고 어쩔 수 없이 설립하게 된 벨 전화회사는 세계 최대 통신사업자 AT&T로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벨은 전화기로 가장 유명하지만 그는 평생 다양한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1881년 7월 2일 총격을 당한 제임스 가필드(James Abram Garfield) 미국 대통령의 몸에 박힌 총알을 찾기 위해 금속 탐지기를 개발했던 것도 벨이었다. 그밖에도 소리를 녹음하고 재생할 수 있는 그라포폰(Graphophone), 청력 문제를 감지하기 위한 오디오미터(Audiometer)도 그가 만들었다.
장애인에 대한 각별한 애정으로 연구소를 설립해 장애 아동 교육을 지원도 이어갔다.
최초로 전화기를 발명한 사람이 누구인지를 꼽는 일은 오랜 논쟁거리였다. 벨 이전에도 전화기라는 개념은 있었다. 벨이 전화기 발명에 열중하던 시기에도 많은 발명가들이 전화기를 개발하고 있었다. 그중에서는 발명가 안토니오 메우치(Antonio Meucci), 독일의 기술자 요한 필리프 라이스(Johann Philipp Reis) 등 기술력이 뛰어나고 우수한 전화기를 발명한 사람도 있었다. 소리와 음악 등에 관심과 지식은 많았지만, 기술자는 아니다 보니 기술력에서는 아무래도 다른 발명가들에게 밀리는 감이 있었다. 하지만 벨이 특허권을 먼저 접수하면서 역사는 벨을 중심으로 흘러가게 된다.
2002년 6월 미국 의회에서는 안토니오 메우치가 전화기를 만든 최초의 발명가라고 공식적으로 인정한다. 메우치는 이미 1860년에 옆방에 있는 아내와 통화에 성공한 것으로 알려진다. 벨이 전화기 특허를 신청하기 5년 전에 임시 특허를 냈으나 특허 등록 비용과 갱신 비용을 감당하지 못해 끝내 권리를 포기하고 말았다.
1922년 8월 2일 벨은 당뇨병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아내와 두 딸을 남겨두고 세상을 떠났다. 북미 지역에서는 약 1분간 전화 시스템을 중단하며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벨이 전화기를 발명한 최초의 사람은 아닐지라도 그가 통신 기술 발전에 기여한 바는 적지 않다.
출처: Tech Pl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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