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5. 7. 22:21ㆍLife/상식 & 교육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복사 용지는 A나 B로 시작된다. A 사이즈 중 가장 큰 A0 용지(841×1189㎜)를 반으로 자르면 A1이고, 그것을 다시 반으로 자른 것이 A2다. 가장 많이 사용하는 A4의 경우 A0을 네 번 자른 것이다.
B 역시 마찬가지여서 1456×1030㎜의 B0 용지를 반으로 잘라 나가면 B1, B2, B3, B4가 된다. 즉, 종이의 A, B 규격은 손실 부분 없이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제정된 셈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규격을 만든 이가 바로 1909년 노벨 화학상 수상자인 프리드리히 오스트발트라는 사실이다.
그는 노벨상을 받던 1909년 A, B 종이 규격을 만들었으며, 1922년에 독일공업규격위원회가 이를 채택했다. 자체적인 종이 규격이 있는 영국이나 미국 등의 일부 국가를 제외하고는 독일식 규격이 국제 기준으로 사용된다.
물론 세계적인 화학자인 오스트발트가 노벨상을 수상한 것은 종이 규격과 전혀 상관이 없다. 오스트발트는 1853년 9월 2일 라트비아의 수도인 리가(당시 러시아 영토)에서 독일 이민자 가정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리가 지역에서 초기 교육을 받은 후 1872년 도르파트대학(현 타르투국립대학)에 입학한 그는 칼 슈미트 밑에서 화학을 전공해 4년 만에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도르파트대학에서 조교로 일하다가 1881년에 리가공업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평소 산과 염기의 반응 중에 일어나는 부피 변화에 관한 연구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스웨덴의 아레니우스가 보내온 박사학위 논문을 본 후 촉매에 대해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다.
화학 반응에 참여해 반응 속도를 증가 또는 감소시키지만 그 자신은 전혀 변하지 않는 촉매작용은 1835년 베르셀리우스에 의해 명쾌하게 규명됐으나, 그 후 일부 과학자들로부터 헛된 주장이라는 혹평에 시달리기도 했다.
촉매에 대한 현대적 정의 내려
오스트발트는 30가지 이상의 서로 다른 산 용액들을 촉매로 연구해 산의 전도도와 반응속도가 비례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후 다른 촉매에까지 범위를 확대해 장기간 연구를 수행한 결과, 그는 촉매에 대해 최초로 현대적 정의를 내림과 동시에 모든 분야의 화학에서 촉매 과정의 중요한 역할을 밝혀냈다.
특히 그는 촉매가 화학반응을 가속시킬 수는 있지만 반응의 방향을 변화시킬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1902년에는 암모니아를 질산으로 전환하는 오스트발트 공정을 개발해 특허를 받았다. 그는 공업적으로 매우 중요한 이 공정에서 가열된 철사를 촉매로 사용했다.
그가 남긴 과학 업적 중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오스트발트의 희석률’이다. 그는 약한 전해질 수용액에서는 이온화된 결과로 생긴 이온과 비이온화된 전해질 분자 사이에 이온화 평형이 성립한다는 사실을 실험으로 밝혀낸 후 전해질 용액이 희석되는 정도와 전리도의 관계식을 도출했다.
하지만 1888년에 제안된 전해질 용액의 이온화도와 농도에 관한 이 법칙은 아세트산 등의 약한 전해질에서는 잘 성립하지만, 강한 전해질에서는 적용할 수 없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그는 촉매에 관한 연구와 화학 평형 및 반응속도에 관한 기초연구 업적을 인정받아 1909년 노벨 화학상을 수상했다.
그는 화학 현상에 물리학을 적용한 물리화학의 창시자이기도 하다. 그가 1887년에 반트호프, 아레니우스와 함께 창간한 ‘물리화학 잡지’는 물리화학의 탄생을 알린 사건이었다. 일각에서는 이 세 사람 간의 끈끈한 유대관계가 그에게 노벨상을 안긴 결정적인 요소였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반트호트는 1901년에, 그리고 박사학위 논문에 반해 오스트발트가 직접 웁살라대학에 취업시킨 아레니우스는 1903년에 노벨 화학상을 각각 수상했다. 1909년 당시 노벨상 위원회에 관여하고 있던 아레니우스는 물리화학의 창시자 세 명 중 유일하게 노벨상을 받지 못한 오스트발트를 강력하게 추천한 것으로 전해진다.
은퇴 후 다양한 분야 연구에 몰두해
오스트발트는 노벨상을 받기 3년 전인 1906년 라이프치히대학 교수직에서 은퇴한 후 인근의 개인 사유지에 도서관과 실험실을 만들고 프리랜서 연구원으로 계속 일했다. 이때부터 그는 평소 관심이 많았던 다양한 분야에 대한 연구에 몰두했다.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가 컬러 이론 분야의 색 체계에 관한 연구다. 그는 모든 색이 흰색과 검은색, 순색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고, 색상에 따른 흰색 및 검은색의 함량을 표시한 색 체계를 만들었다. 또한 8가지 기본색을 각각 3단계로 나누어 구성한 24색상을 둥글게 배치한 색상환을 만들기도 했다.
또한 그는 과학적 진보의 일반 법칙, 위대한 과학자들의 심리적 특성, 과학적 창의성을 위한 조건 등에도 관심이 많았다. 그는 위인이나 성공한 사람들의 공통점을 조사한 후 그들에게는 긍정적 마인드와 독서라는 두 가지 공통점이 있다고 주장했다.
특히 그는 과학에 대한 공리주의적 사고가 강했는데, 사회적인 낭비가 과학 발전의 모든 장애물이라고 생각했다. 이에 따라 국내외적으로 교육 및 기타 여러 분야에서 열렬한 개혁가가 되었는데, 국제적인 종이 규격을 제정한 것도 이 같은 작업의 연장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외에도 그는 세계적인 평화운동과 에스페란토어처럼 만국민이 사용할 수 있는 세계어 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생전에 45권의 책과 약 500개의 과학 논문, 5000개의 리뷰, 1만 개 이상의 편지를 남길 만큼 글쓰기를 좋아했던 그는 방광 및 전립선 질환으로 입원한 라이프치히 병원에서 1932년 4월 4일 사망했다. 그가 묻힌 곳은 은퇴 후 자신만의 실험실과 도서관이 있던 개인 사유지였다.
출처: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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