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의 고궁은 왜 오후 5시만 되면 문을 닫을까?

2020. 5. 11. 21:30비즈니스/중국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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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의 고궁(故宮, 구궁)은 원래 자금성(紫禁城, 쯔진청)으로 불리던 명, 청대의 황제가 거처하던 세계 최대 규모의 황궁이다. 자금성은 신해혁명으로 청조가 멸망하고, 중화민국 시대에 국립 고궁박물원(國立故宮博物院)으로 불렸다. 자금성은 원래 황제가 기거하던 궁궐로, 왕조시대엔 보통 백성들은 들어갈 자격이 없었으며, 고궁의 앞쪽은 황제가 대신들과 정무를 의논하는 곳이고, 고궁의 뒤쪽은 황가의 사람들이 거주하던 곳이었다.

 

명태조 주원장의 넷째 아들인 주체(朱棣: 명 3대 황제, 명성조, 영락제, 1360〜1424년)가 조카 건문제의 제위를 찬탈한 후, 그는 수도를 남경에서 북경으로 옮겼고 1406년 자금성 건축을 시작했다. 14년이 걸린 이 공사엔 100만 명 이상의 인력이 투입되었고, 중국 남서부에서 자라는 최상급 녹나무와 베이징 인근에서 채취한 희고 큰 대리석을 사용하였고, 정전의 바닥은 특별히 쑤저우에서 구운 금전(金砖: 금색의 벽돌)으로 포장하였다.

 

자금성이란 이름은 1576년 처음 공식적으로 나왔다. 자금성의 자(紫: 자줏빛 자)는 북극성을 의미하고, 자금성은 곧 우주와 같은 공간으로 생각되어, 하늘로부터 신성함을 부여받은 황제와 가족의 영역이었다. 자금성은 백성들이 사는 세속적인 세상과 천자가 거주하는 신성한 세상을 분리하는 공간으로, 이는 황제의 신성함과 불가침성을 높여주는 역할을 하였다. 또한 금(禁: 금지할 금)은 황제의 허락 없이는 누구도 궁을 들어오거나 떠날 수 없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자금성은 1420년부터 1644년 동안 명 왕조의 중심지였으나, 명 후기 왕조의 혼란이 극심해지며 내부 농민 반란군인 이자성에 의해 자금성은 함락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북쪽에서 후금 군대가 몰려오고 전황이 불리해지자, 잠깐 황제를 칭했던 이자성은 자금성 일부에 불을 지르고, 명나라 장수 오삼계가 이끄는 후금 군대가 오기전에 도망쳤다. 이후 만주족의 청나라는 3대 황제 순치제가 자금성에 입성하여 대청제국 의례를 거행한다.

 

자금성은 명, 청대 24명의 황제가 거주하던 황궁으로 1912년 마지막 황제 부의가 퇴위할 때까지 중국의 정치적 중심이었다. 신해혁명 이후 자금성의 외성은 공용으로 넘겨졌지만, 내성에는 1924년 쿠데타로 쫓겨나기 전까지 마지막 황제 부의(溥仪)가 거주했다. 1925년에 고궁박물관이 자금성안에 지어졌고, 1933년에 청일전쟁이 일어나며 자금성 내부의 국보급 보물들은 외부로 옮겨졌다.

 

남경, 중경 등에 흩어져 있던 보물들 상당수는 1948년 장제스의 국민당이 대만으로 반출하여, 타이베이 국립 고궁박물관에서 다시 일반에게 공개되었다. 중화민국 시기 마지막 황제 부의마저도 쫓겨 나가서 자금성은 한동안 주인없는 궁궐이었다. 그러다 1925년 자금성은 고궁박물원으로 처음 문을 열었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자금성과 황제가 소유했었던 국보급 문화재들을 참관할 수 있도록 개방하였다.

 

 

자금성은 동서로 760m, 남북으로 960m, 72만 m²의 넓이에, 높이 11m, 사방 4km의 담과 800여채의 건물과 일명 9999개의 방(실제로는 8707칸이라 함)이 배치되어 있다. 자금성 주위에는 해자와 성벽들로 둘러싸여 있다. 해자의 너비는 52m, 깊이는 6m에 이른다. 해자에는 동서남북으로 해자를 가로지르는 4개의 다리가 있다. 궁궐 주위 장벽의 길이는 4km에 이르며 높이는 10m나 되며 4개의 큰 출입구가 뚫려 있다.

 

베이징 고궁은 중국에 현존하는 가장 크고 보존이 잘된 고건축물이며, 자금성 안에는 오직 황제만 사용할 수 있는 황제의 상징인 용 문양이 곳곳에 새겨져 있다. 고궁은 방대한 규모에 건립된 지 600여년된 역사의 시간 때문에, 고궁 안의 문물들을 보호하기 위해 고문화재를 유지, 보수하기 위한 기술자들도 특별히 배치되어 있다. 그래서 고궁 안의 문물들은 상태가 비교적 온전해 보이고 심한 손상을 입지 않았다.

 

 

고궁은 면적과 규모가 매우 커서 관광객들이 내부를 돌아 보려면 상당히 많은 시간이 걸린다. 대충 둘러보아도 몇 시간은 족히 걸리고, 한두 번에 고궁의 내부 건축물과 국보급 문화재들을 전부 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이징의 고궁은 하절기엔 17:00, 동절기엔 16:30에 문을 닫는다. 왜 고궁은 오후 5시만 되면 문을 닫는 걸까? 베이징의 고궁이 비교적 이른 시간인 오후 5시에 문을 닫는 이유는, 1959년 일어난 한 사건이 영향을 미쳤다.

 

지금은 발생한지 많은 시간이 지나 아는 사람이 많지 않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 국가 문물보호국과 고궁박물원 측이 경각심을 가졌기 때문이다. 베이징 고궁에는 많은 문물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이들 국보급 문화재들은 상상을 초월하는 가치를 지니고 있다. 고궁의 개방 초기 관광객들이 고궁을 관람하러 갈 때는 당연히 고궁의 건물과 내, 외부의 문화재들을 감상하러 가지만, 몇몇 사람들은 방문 목적이 단순 참관이 아니라 다른데 있었다.

 

 

1959년 중화인민공화국 성립이후 나라 전체가 어수선하고 궁핍한 상황에서, 한 사람은 베이징 고궁의 문화재를 훔칠 생각과 기도를 하였다. 이 절도범은 사전에 여러번 고궁을 참관하면서 고궁의 구조를 충분히 익혔고, 내부에 전시된 국보급 문화재중 자신이 절도할 대상을 탐색하였다. 그리고 어느날 그는 참관을 명목으로 고궁에 들어가, 고궁안에서 어두운 밤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몰래 황극 전에 들어갔다. 그는 미리 보아두었던 문물의 유리를 깨고 그 안에서 문화재 몇 점을 훔쳐냈다.

 

당시 고궁의 치안 요원들은 다음날 이를 발견한 후 즉시 경찰에 신고하여 사건을 조사했다. 경찰은 고문화재 장물 시장과 주변인에 대한 탐문 탐색을 통하여 산동에서 용의자의 종적을 찾아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경찰들이 산동 수광(山东寿光)에서 범인을 체포하였을때, 그는 이미 절도한 문화재를 팔아버린 다음이라 회수할 수가 없었다. 이 사건 이후 문물보호국과 고궁에선 같은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 하절기 기준 오후 5시 해가 지기전에 문을 닫도록 하는 규정을 내려 엄격하게 지켜온 것이다.

 

 

출처: 상하이 신의이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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