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몰라도 삼성은 안다… 자본금 3만원의 기적

2024. 3. 22. 21:02Life/상식 &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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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그룹의 시초 삼성상회 창립

이병철 삼성 창업회장이 1938년 3월22일 대구에서 삼성상회를 설립했다. 사진은 1980년 7월4일 전경련 주최 최고경영자연수회에서 강연 중인 이 창업회장의 모습.

1938년 3월22일. 대구에서 삼성상회가 설립됐다. 창업자는 이병철 삼성 창업회장. 그는 당시 자본금 3만원(현재가치 3억원)으로 회사를 설립해 삼성을 오늘날 재계 서열 1위 기업으로 만들었다. 

이 창업회장은 삼성상회를 설립하면서 삼성이라는 사명을 처음으로 사용했다. 삼성상회는 주로 밀가루, 청과 등을 판매했고 이는 후에 제일제당으로 이어졌다. 삼성상회의 시작은 현재 삼성그룹 이미지인 다양한 전자제품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삼성상회의 첫 로고에는 별표국수라고 적혀있다. 현재의 파란색 삼성 로고는 삼성상회 창립 후 55년 뒤에 등장했다. 밀가루, 청과를 팔던 삼성상회가 지금의 국내 재계 서열 1위 대기업이 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1세대 기업인 이병철, 삼성·CJ·신세계 탄생시키다

이병철 창업회장은 1938년 3월22일 대구에서 삼성상회를 설립한 뒤 제분업과 제면업 사업을 시작했다. 사진은 삼성상회에서 판매하던 별표국수의 로고.
이병철 창업회장은 1938년 3월22일 대구에서 삼성상회를 설립한 뒤 제분업과 제면업 사업을 시작했다. 사진은 삼성상회에서 판매하던 별표국수의 로고.

이 창업회장은 조홍제, 허정구 등과 함께 삼성상회를 설립했다. 제분업과 제면업으로 사업을 시작한 이 창업회장은 대표 상품이었던 별표국수가 대구에서 인기를 얻자 사업을 확장했다. 제분업·제면업에 이어 건어물과 과일 유통 무역업까지 진출한 것이다.

사업이 빠르게 성장하자 이 창업회장은 1942년 조선양조를 인수했다. 이를 계기로 대구에서 서울로 사업을 확장했다. 하지만 사업이 성장하던 시기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사업이 주춤하게 됐다. 

이 창업회장은 대구 과수원과 양조장, 삼성상회의 종잣돈으로 1951년 부산광역시에서 삼성물산을 설립했다. 전쟁으로 발생한 고철을 수집한 그는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쇠가 부족했던 일본에 고철을 팔았고 고철 수익으로 중국에서 설탕과 비료를 수입해 국내 시장에 판매했다. 

그는 이 사업을 시작한지 6개월 만에 10억원이 넘는 이익을 얻었다. 1년 뒤에는 무려 60억원이라는 수익을 달성했다. 삼성물산은 벌어들인 수익으로 1953년 제일제당(CJ그룹 전신), 1954년 제일모직을 설립했다. 이 시기에 삼성물산은 다양한 사업을 펼치며 규모를 키우기 시작했다.

이 창업회장은 1940년대 광복 전후부터 사업 성공의 길을 걸었다. 특히 1950년대 한국전쟁 시기에는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 1세대 기업인 시대를 열었다.

삼성그룹에 닥친 최대 위기, 사카린 밀수 사건

사카린 밀수 사건 이후 위기를 겪던 삼성그룹은 장남 이맹희 CJ 명예회장, 차남 이창희 전 세한미디어 회장 대신 막내였던 이건희 전 삼성 회장이 차기 수장으로 지명됐다. 사진은 지난 1987년 8월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 3라인 착공식에 참석한 이병철 선대회장(맨 오른쪽)과 이건희 전 회장(오른쪽 두번째)의 모습.
사카린 밀수 사건 이후 위기를 겪던 삼성그룹은 장남 이맹희 CJ 명예회장, 차남 이창희 전 세한미디어 회장 대신 막내였던 이건희 전 삼성 회장이 차기 수장으로 지명됐다. 사진은 지난 1987년 8월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 3라인 착공식에 참석한 이병철 선대회장(맨 오른쪽)과 이건희 전 회장(오른쪽 두번째)의 모습.

삼성그룹도 위기가 있었다. 1966년 사카린 밀수 사건이 터지면서다. 당시 이 창업회장의 장남 이맹희 명예회장이 정치 비자금 조성 목적으로 삼성의 밀수를 눈감아주기로 했는데 여론에 알려지면서 정치 비자금 게이트로 확대된 것이다. 이 일로 이 창업회장은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고 한국 비료공장(현 롯데정밀화학)과 경주 최씨 가문으로부터 기증받은 대구대학을 정부에 넘겼다.

물러난 이 창업회장의 뒤를 이어 이맹희 명예회장이 사업을 이끌었다. 위기 속에서 흔들림을 겪던 삼성그룹은 장남 이맹희 CJ 명예회장, 차남 이창희 전 세한미디어 회장이 후계 구도에서 밀려나고 막내였던 이건희 전 삼성 회장이 1976년 삼성그룹의 공식적인 차기 수장으로 지명됐다.

삼성그룹 대표하는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으로 '날개'

삼성그룹을 대표하는 삼성전자의 반도체 사업은 1983년 3월 시작됐다. 사진은 지난 2019년 8월6일 삼성전자 천안 사업장 내 반도체 패키징 라인을 둘러보는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가운데)의 모습.
삼성그룹을 대표하는 삼성전자의 반도체 사업은 1983년 3월 시작됐다. 사진은 지난 2019년 8월6일 삼성전자 천안 사업장 내 반도체 패키징 라인을 둘러보는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가운데)의 모습.

삼성그룹을 대표하는 삼성전자는 1969년 시작됐다. 이 창업회장의 전자사업 진출에 대해 금성사(현 LG전자)와 정·재계의 반발이 극심했다. 이에 이 창업회장은 '삼성전자는 TV, 라디오, 냉장고 등 생산품 중 극히 일부만 국내에 공급하고 나머지는 전량 수출한다'는 조건으로 정부로부터 사업허가를 받았다. 이미 금성사가 국내 시장을 장악했기 때문에 당시 삼성전자는 금성사에 밀린 2등 신세였다.

위기는 기회라는 말의 표본처럼 이 창업회장에게 삼성전자를 성장시킬 기회가 찾아왔다. 1982년 미국을 방문한 이 창업회장은 일본에 자동차, 반도체 시장을 잠식당한 미국의 모습을 보고 반도체 사업을 추진할 계획을 세웠다.

1983년 3월 이 창업회장은 반도체 사업 진출을 공식화하며 미국 유학파를 대거 스카우트했다. 호기롭게 시작했지만 사업 성장은 쉽지 않았다. 1984년에만 적자 규모가 1300억원에 달할 정도였다. 그러나 꿋꿋하게 사업을 밀어붙인 이 창업회장은 결국 1992년 64Mb D램을 세계 최초로 개발하는 데 성공하며 반도체 사업을 성공 궤도에 올려놨다. 이로써 삼성그룹은 전자 사업으로 국내 재계 순위 1위 기업이라는 이미지를 견고히 쌓았다. 

출처: https://www.moneys.co.kr/article/2024031814592165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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