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3세대 지도자 '장쩌민'

2022. 12. 1. 22:06비즈니스/중국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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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방문한 첫 중국 국가주석
베이징 올림픽유치, WTO 가입
상하이방 원로

중국 관영 신화통신은 장쩌민(江澤民) 전 중국 국가주석이 백혈병 등으로 인해 상하이에서 치료를 받다 30일 낮 12시 13분(현지시간) 장기 기능이 쇠약해져 응급 처치했으나 향년 96세에 별세했다고 보도했다.

장쩌민

장 전 주석은 마오쩌둥(毛澤東), 덩샤오핑(鄧小平)에 이어 중국의 제3세대 지도자로서 1989년 톈안먼(天安門) 사태로 실각한 자오쯔양(趙紫陽)의 뒤를 이어 덩샤오핑에게 발탁돼 당 총서기에 올랐다.

장쩌민은 통치 기간 중 공산당 총서기(1989~2002년), 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1989~2004년), 국가주석(1993~2002년)으로 당·정·군을 장악했다. 그는 15년간 중국을 통치하며 경제 성장을 이끌었던 공산당 파벌인 상하이방(上海幇·상하이 출신 정·재계 인사)의 수장이었다.

그는 상하이 당 서기 시절인 1989년 톈안먼(天安門) 민주화 시위 때 학생들을 옹호했다가 축출된 자오쯔양(趙紫陽) 총서기의 후임으로 하루아침에 중국 정치 중앙 무대에 등장했다. 덩샤오핑은 중국 정부의 무력 진압을 지지했던 장쩌민에게 그해 5월 총서기 자리를 제안했다. 장쩌민이 웃날 “전혀 준비가 돼 있지 않았다”고 회고할 정도로 갑작스러웠다.

다음 달인 6월 총서기로 정식 선출된 장쩌민은 처음에는 덩샤오핑의 가려 실권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톈안먼 시위에 대해 “일말의 관용도 없다”며 강하게 탄압하면서 권력을 강화해 갔다. 그해 12월 당 중앙군사위 주석에 올랐다. 1992년 덩샤오핑이 사실상 은퇴한 뒤 1993년 3월 국가주석까지 맡으며 중국 최초로 당(党), 정(政), 군(军)의 모든 권력을 거머쥐었다.

장쩌민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노선을 충실히 계승해 중국의 경제 도약을 일궜다. 2001년 세계무역기구(WTO) 가입, 2008년 베이징 하계올림픽 유치, 홍콩(1997년)과 마카오(1999년)의 반환 등 재임 중 정치, 경제, 외교 이정표를 세웠다.

장쩌민은 정부에 대한 공산당의 통제를 강화해 소련 몰락으로 위기를 맞았던 중국 내부 정치를 안정시키면서 경제를 발전시켰다. 그의 이런 통치 방식은 ‘신(新)권위주의’ ‘개발독재’ 등으로 불렸다.

장쩌민 임기 동안 중국은 매년 평균 8%의 경제성장률을 지속하면서 사회주의 시장경제로 전환을 계속했다. 국가가 100% 소유하고 있던 국영기업의 지분을 일부 민간과 외국인에게 매각하는 등 시장경제 요소가 증가하는 구조개혁이 진행됐다. 그는 국민 생활을 ‘원바오(溫飽·기본 의식주 해결)’ 수준에서 ‘샤오캉(小康·일상생활에 걱정이 없으며 다소 여유가 있음)’ 수준으로 한 단계 올려놓고 개혁개방을 지속적으로 추진했다. 집권 기간 연평균 9.3%의 고속 경제 성장을 유지하며 미국과 함께 G2(주요 2개국)로 성장할 수 있게 됐다.

홍콩 반환(1997년) 마카오 반환(1999년)도 일국양제에 대한 존중을 표시한 장쩌민 임기 때 이뤄졌다. 1997년 미국 국민 방문고 1998년 빌 클린턴 대통령의 중국 방문으로 톈안먼 사태 이후 냉랭했던 미중 관계도 개선되기 시작했다.

홍콩, 마카오반환

2002년 중국 공산당 헌장에 삽입된 장쩌민의 3개 대표 사상은 개혁개방에 따라 주요 사회 세력으로 상정한 자본가와 지식을 포용해 공산당의 권력 기반을 자본가 계급으로 넓혀야 한다는 이론이다.

장 전 주석은 2002년 후진타오(胡錦濤)에게 공산당 총서기직을 넘기지만 최고 실권인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직은 2004년 9월에야 넘긴다. 그는 군사위 주석에 물러난 뒤에도 상하이방(上海幇·상하이 출신 정·재계 인맥)의 원로로서 중국 정계에 깊숙이 개입했다. 하지만 장 전 주석이 격대지정(隔代指定·현 지도자가 차차기 지도자 지정)으로 지명한 시진핑(習近平) 주석이 집권한 후 부패척결에 드라이브를 걸면서 보시라이(薄熙來) 전 충칭(重慶) 당 서기와 저우융캉(周永康) 전 중앙정치법률위원회 서기 등이 숙청됐고 상하이방은 몰락했다. 마지막 공개석상에 등장한 것은 2019년 10월 1일 신중국 건국 70주년 기념식이다. 지난달 20차 중국 공산당 전국 대표대회에 불참했다.

그는 중국 정치의 안정과 경제 성장을 이뤄낸 지도자로 평가되지만 2600여 명이 체포된 것으로 알려진 톈안먼 시위에 대한 폭력 진압, 1999년 수천 명을 체포한 것으로 알려진 파룬궁 탄압에 대한 비판이 많다. 또 장쩌민 통치 기간 중 중국이 경제성장에만 집중하면서 빈부 격차와 환경 파괴를 방치했고 중국은 이 두 가지 문제로 여전히 어려움을 겪고 있다.

김영삼, 장쩌민
94년 중국을 국빈 방문한 김영삼 대통령(왼쪽)이 장쩌민 국가주석과 한·중 정상회담 직후 만찬을 하면서 건배하고 있다. 출처: 연합뉴스

한국을 방문한 첫 중국 국가주석

1992년 한·중 수교 중심에도 그가 자리 잡고 있다. 한·중 수교 이후인 1995년 11월 중국 최고 지도자로서는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해 김영삼 당시 대통령과 제주도에서 정상회담을 했다. 장 전 주석은 중국에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수행원들에게 “한국이 30년 짧은 세월 동안 발전한 원인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교훈을 얻어야 한다”고 강조한 것으로 알려졌다. 1998년 김대중 대통령이 중국을 국빈 방문했을 때 장 전 주석은 양국 관계를 ‘선린우호관계’에서 한 단계 높여 ‘협력 동반자관계’로 끌어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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