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리코 페르미 _ 최초로 인공적인 우라늄 핵분열 연쇄반응 성공

2020. 5. 7. 21:59Life/상식 &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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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12월 2일, 미국 시카고대학교 풋볼 구장 지하의 스쿼시 코트에 우라늄과 흑연을 섞어 만든 거대한 기둥 주위로 물리학자들이 몰려들었다. 그중 한 물리학자가 신호를 보내자 중성자를 흡수하는 카드뮴 조절 막대가 조금씩 움직였고, 시간이 흐를수록 방사능이 조금씩 증가하기 시작했다.

 

점심시간이 거의 지났을 무렵 그 물리학자는 다시 신호를 보냈다. 자신의 예상대로 거대한 우라늄 기둥이 실험을 성공리에 마쳤기 때문이다. 함께 실험을 지켜본 한 과학자는 곧바로 미국 정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전보를 쳤다. “이탈리아 항해자가 신세계에 들어섰다. 원주민의 반응은 매우 좋았다.”

 

인류 역사상 최초로 인공적인 우라늄 핵분열 연쇄반응 실험에 성공한 순간이었다. 여기서 이탈리아 항해자란 바로 그 실험을 이끈 이탈리아의 물리학자 엔리코 페르미다.

 

새로운 방사능 물질과 느린 중성자의 특별한 능력을 발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38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엔리코 페르미. © public domain

 

이 실험의 성공으로 미국은 원자폭탄을 제조해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던 것은 물론 원자력 발전의 시대로 진입할 수 있었다. 그럼 왜 이탈리아의 물리학자가 미국으로 건너와 그 같은 실험을 주도한 것일까.

 

엔리코 페르미는 1901년 9월 29일 로마에서 철도공무원인 아버지와 교사를 하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2남 1녀 중 막내였던 그는 어릴 때부터 명석함을 드러내다가 14세에 물리학 공부를 시작했다.

 

대학 입시 때 작성한 수학 답안지가 너무 정교해 시험 감독관들이 박사급 실력자라고 찬사를 보낼 정도였다. 피사의 왕립대학을 졸업한 후 1922년에 물리학 박사 학위를 받았는데, 그로부터 4년 후인 25세 때 양자역학과 수학을 접합한 ‘페르미-디랙 통계’를 발표해 세계적인 학자의 반열에 올랐다.

 

중성자 이용해 새로운 동위원소 만들어

 

1926년 로마대학의 이론물리학 교수가 될 무렵부터 원자의 양자론을 연구하다 원자핵 연구에 푹 빠진 그에게 새로운 아이디어를 준 건 바로 원자붕괴 실험이었다. 당시 졸리오 퀴리 등은 헬륨핵의 방사선을 이용해 원자를 붕괴시켜 인공 방사능을 만드는 데 성공해 주목을 끌었다.

그러나 이 같은 방식은 원자번호 20 이하, 즉 주기율표 상의 가벼운 원소들에만 적용할 수 있었다. 그런데 페르미는 중성자를 이용해 무거운 원소까지 쪼개는 데 성공했다. 헬륨의 핵은 전하를 띠고 있어 반발력을 가지는 반면 전하를 띠지 않는 중성자는 어떠한 원자의 핵이라도 다가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실험에 성공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페르미는 또 하나의 중요한 사실을 알아냈다. 중성자를 수소핵과 충돌시켜 속도가 감소된 ‘느린 중성자’로 만들 경우 훨씬 더 강력한 효과를 낼 수 있다는 사실이 바로 그것이다.

 

페르미는 느린 중성자를 이용해 거의 모든 원소에서 방사능 동위원소를 만들었다. 심지어 원자번호 92번이자 주기율표 상의 마지막 원소인 우라늄에 적용해 원자번호 93인 넵튜늄과 94인 플루토늄이라는 두 개의 새로운 원소를 만드는 데도 성공했다.

 

페르미는 새로운 방사능 물질과 느린 중성자의 특별한 능력을 발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38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그는 노벨상을 받자마자 그 상금을 이용해 미국으로 망명했다. 유대인인 아내를 무솔리니의 파시즘으로부터 지키기 위한 선택이었다.

 

‘천 개의 태양보다 밝다’

 

미국에 도착한 후 컬럼비아대학의 물리학 교수로 임명된 그는 1939년 초 오토 한 등이 핵분열 현상을 발견하자 2차 중성자 방출과 핵 연쇄 반응의 가능성을 연구했다. 그 연구에 성공함으로써 페르미는 세계 최초로 원자로를 설계해 시카고대학의 지하에서 핵 연쇄반응을 인위적으로 조절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이후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가한 그는 1945년 7월에 실시된 최초의 핵폭발 실험 현장에도 있었다. 당시 지름 76m의 웅덩이가 생길 만큼 엄청난 핵폭발을 지켜본 후 그는 ‘천 개의 태양보다 밝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트리니티’라는 암호명으로 행해진 이 실험이 행해지기 직전 및 실험 후 핵폭풍 충격파가 지나갔을 때 페르미는 각각 종이를 떨어뜨려 그 위치 변화로 원자폭탄의 위력을 측정했다. ‘페르미 추정’이라고 불리는 이 과학적인 계산법은 집회에 활용된 공간의 전체 면적을 계산하고 단위 면적당 가능 인원을 계산해 집회에 참여한 전체 인원을 추정하는 방식으로도 응용되고 있다.

 

이처럼 사소한 것조차 과학적 연구의 한 방법으로 여겼던 그의 생활 방식은 죽는 순간까지도 계속됐다. 암으로 입원한 병실에서마저 자신에게 주입되는 주사제의 방울이 떨어지는 것을 보며 스톱워치로 시간을 측정한 것.

 

하지만 원자폭탄과 원자력 발전의 핵심 이론을 제공한 위대한 천재는 결국 암을 이겨내지 못하고 1954년 11월 28일 5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미국 정부는 1967년에 설립한 국립가속기연구소를 7년 후 그의 이름을 따서 페르미연구소로 개칭했다. 미국에너지국 산하의 이 연구소는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와 함께 세계 최고, 최대의 입자물리연구소로 꼽힌다.

 

 

출처: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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