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드리히 베르기우스 _ 석탄으로 석유를 만든 화학자

2020. 5. 7. 21:43Life/상식 &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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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직전인 1938년 독일의 석유 소비량은 4400만 배럴이었다. 당시 미국이 약 10억 배럴을 사용하고 있었으니 엄청나게 적은 양이었다. 전쟁이 개시되자 최대 산유국 미국은 연합국들에게 아낌없이 석유를 제공했다.

 

반면 유전이 없던 독일은 전투기와 전차 등 군용 유류의 공급 부족에 시달려야 했다. 그럼에도 독일은 자신 있게 전쟁을 시작했으며, 무려 6년이라는 긴 전쟁 기간을 버텨냈다. 그 비결은 풍부하게 보유하고 있던 석탄을 액화시켜 합성석유를 만드는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석유나 석탄의 주성분은 똑같이 탄소와 수소이다. 차이가 있다면 석유는 수소의 비율이 13% 이상인 데 비해 석탄은 5% 이하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따라서 석탄에 수소를 첨가해주면 석유와 유사하게 전환시킬 수 있다.

 

노벨상 수상자 강연회 전날 스톡홀름의 한 호텔에서 아내와 함께 포즈를 취한 베르기우스(오른쪽). ⓒ public domain

 

이에 따라 여러 과학자들이 석탄으로 인공석유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왔는데, 그중에서도 획기적인 방법으로 합성석유의 제조에 성공한 이가 있다. 독일의 화학자 프리드리히 베르기우스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석탄을 석유로 만들기 위해서는 석탄에 있는 고체 탄화수소를 과도한 열에 의해 파괴되지 않도록 하고 압력을 가해 수소를 넣어주어야 한다. 베르기우스는 이 같은 고압 반응 기술을 독자적으로 개발했다.

 

석탄이 수소가스와 고압에서 가열되면 과열 현상이 일어나 만들 수 있는 석유의 양이 적어질 수 있다. 베르기우스는 그 같은 국소 과열 현상을 피하기 위해 석탄을 잘게 부스러뜨려 중유와 섞고, 그것을 고압의 수소로 처리하는 방법도 개발했다.

 

그는 이처럼 간단하면서도 아주 기발해 보이는 방법으로 1913년에 석탄의 대부분을 중유나 중질유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외부 활동 중단한 채 연구에만 몰두

 

베르기우스는 1884년 10월 11일 독일 브레슬라우 근처의 골드슈미덴에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는 브레슬라우의 경제학 교수였으며, 아버지는 화학공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때문에 그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로부터 다양한 작업 방법과 화학 기술 과정을 현장에서 배울 수 있었다.

 

일찌감치 화학자로서의 꿈을 키운 그는 1903년 브레슬라우대학에 입학한 후 라이프치히대학, 베를린대학 등에서 공부했다. 이후 고압 화학공업 연구에 주력한 그는 하노버에 공장과 연구원이 있는 개인 실험실을 설립할 만큼 합성석유 연구에 빠져들었다.

 

특히 그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이후 다른 외부 활동은 모두 젖혀둔 채 연구에만 몰두했다. 전쟁이 일어난 후 독일이 석유 부족으로 곤욕을 치르는 상황을 생생히 목격했던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베르기우스는 자신의 연구결과를 실용화시킬 수 있는 회사를 찾기 위해 노력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더욱 높은 품질의 석유를 생산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다. 독일의 IG 사와 협력 협정을 체결한 이후 이전까지 사용하지 않았던 촉매를 사용하게 된 것이다.

 

이후 석탄을 휘발유로 전환할 수 있게 됐으며, 1926년에는 독일의 로이나에 연간 생산량 10만 톤 규모의 본격적인 합성석유 공장이 건설됐다. 그가 개발한 화학적 고압법은 합성석유의 제조뿐만 아니라 석유산업의 여러 분야에도 적용되었다. 이 같은 업적을 인정받아 그는 카를 보슈와 공동으로 1931년 노벨 화학상을 수상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1939년 독일의 합성석유 1일 생산량은 7만 2000배럴에 이르렀다. 전쟁이 치열해진 1943년 1일 생산량은 12만 4000배럴이었으며, 1944년 초에는 독일군 전체 유류 사용의 57%를 합성석유가 담당했으며 항공용 가솔린의 경우 95%가 합성석유로 충당되고 있을 정도였다.

 

종전 후 아르헨티나에서 사망

 

이 같은 상황을 주시한 연합군은 1944년 5월 수백 대의 폭격기를 동원해 독일의 합성석유 공장들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렸다. 당시 피폭된 합성석유 생산시설을 시찰한 독일의 군수장관은 ‘사실상 전쟁은 끝났다’고 언급했다. 그로부터 1년 후 결국 독일은 항복을 선언했다.

 

베르기우스는 합성석유의 제조에 성공한 이후 목재의 셀룰로오스에서 당분을 추출해 가축 사료로 만드는 연구에 매진했다. 즉, 나무에서 설탕을 추출하는 연구였다. 셀룰로오스를 분해해 설탕과 유사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농축된 염산을 사용해야 했는데, 이렇게 사용된 염산을 완전히 회수하기 위해서는 매우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는 연구에 매달린 지 15년 만에 결국 목재의 사료 전환에 성공했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 베르기우스는 독일에서 자신의 능력을 펼칠 수 있는 일자리를 더 이상 찾지 못했다. 그가 선택한 것은 아르헨티나로의 이민이었는데, 1947년에 아르헨티나로 이주한 그는 산업부장관의 고문으로 일했다. 그러나 이주한 지 2년 만인 1949년 3월 30일에 그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65세를 일기로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했다.

 

베르기우스의 합성석유도 이후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져 갔다. 중동 국가들에서 원유를 대량 생산함에 따라 가격 경쟁력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가가 상승함에 따라 다시 서서히 주목받게 되었다.

 

현재 합성석유 기술 개발에 가장 적극적인 국가는 남아공과 중국이다. 남아공은 인종차별 정책으로 국제 사회의 경제제재를 받아 합성석유 개발에 주력해 현재 세계 최고의 인프라를 구축하고 있다. 경제 발전 속도에 비해 원유 자급률이 낮은 중국 역시 최근 들어 기술 개발 및 대규모 생산 시설을 준공하는 등 합성석유 생산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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